| | | ↑↑ 폐사된 삼정사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내가 아는 산사(山寺)는 거창하고, 유명한 산사가 아니다. 어떤 인연으로 우리 선산 있는 곳에서 50여 미터 더 올라가면 조그만 암자 하나가 있다. 그 곳을 “삼정사(三正寺)”라 불렀다. 주지스님이 같은 마을의 보문댁 둘째 아들이다. 어쩌다 선산에 들리면 스님이 선산 앞을 지나치다가 반갑게 두 손으로 합장하여 주었다. 그 곳에 산사가 있는 것을 이러한 연유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나는 특정 종교의 신자도 아니며, 그러한 곳에 깊은 관심도 없다. 그러나 형들이 고향 지키고 있을 때라 방임할 수는 없었다. 간혹 산소에 들리면 큰형이 그 산사에 건강상 기거하였기에 인사차 들리곤 하였다. 덩달아 봄이면 채소밭 구경 겸 문안차 들리기도 하였다. 여름이면 요사 채가 매우 시원하여 일부러 짬 내어 들리기도 하였다. 가을이면 감, 밤, 채소 등을 얻어 왔다.
우연히 나에게 “산사의 현판 제작을 알아봐 달라.”고 하였다. 글 쓰는 동료에게 부탁하여 집자(集字)를 받았다. 목판제작소에 들러 현판을 새겨 그 산사에 갖고 가서 달아드려 보시하였다. 그 후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살았다.
셋째형이 후두암으로 고생하다 다섯 달 만에 기어이 돌아갔다. 큰형도 증세가 같아 겁이 났던지 경대병원에 입원하여 수술 날짜를 잡은 후에 연락 왔다. 그리고 수술하였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집으로 갔다. 수술 달포 만에 후유증으로 위독하다기에 집으로 찾아가니 산사에 있었다. 그때 누나ㆍ매형들, 형님ㆍ형수들이 많이 찾아와 있었다. 며칠 후에 그렇게 큰형도 그 산사에서 돌아가고 말았다.
산사는 인연으로 자주 찾았는데 큰형 돌아가고 난 후부터는 이래저래 찾기도 뜸해졌다. 그 산사에도 사세(寺勢)가 기울어져 가난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자 산사는 폐사되고 말았다. 한편으로 모처럼 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가 그만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선산 찾아가면 섭섭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폐사는 엄습한 곳으로 바뀌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곳으로 변하였다. 낮이라도 혼자 그 앞으로 오르기가 겁내한다. 막연한 생각이거나 비종교인으로서 비록 암자라 하더라도 산사 찾으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 남 혹은 신에게 의지하려는 손톱만치도 없으면서 기울어지는 경우가 생길 법한데 그만 그렇게 나는 종교와 끝나고 말았다.
구릉지 밀개산에 산사가 있었다. 그 후 주지스님도 딴 곳에서 이사 가서 돌아갔다고 전해 들었다. 인간 삶의 그 끝은 어디인가? 고향에 산사 있어 나이 듦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펑 뚫린 푸른 하늘만 보인다. 알량한 나의 뭔가 사라졌다. 산사는 공기 좋은 산 속에 있어 찾을 만하다 생각하였다. 지금도 그 산사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작은 인연이 끊어졌다. 산사는 음험하게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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