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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대, 한 맺힌 지난날 두려움 없이 살아왔다김항대, 살아왔다
드라마 같은 인생, 김항대의 ‘삶’
가난에 허덕이던 불우했던 과거···초졸에서 학사로
초졸 후 공장과 원양어선 선원 전전, 결국 인생 역전초졸 역전
아픈 아내 위해 ‘주간보호센터’설립이 ‘꿈’
황성신문 기자 / 입력 : 2024년 11월 15일(금) 15:17
ⓒ 황성신문
‘불가능은 없다’ 피맺힌 과거를 긍정의 힘으로 바꾸면서 오직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뤄낸 사람이 있다.
그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이루고, 고진감래(苦盡甘來)를 가슴에 새기며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우뚝 일어섰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하거나 부를 축적해 큰 부자가 되진 않았지만 그가 살아온 일생을 보면 포기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인생철학’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싶다. 애초 그와 인터뷰가 시작됐을 땐 이렇게 어려운 유년 시절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역설적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오늘 이 인터뷰는 눈물바다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1955년생 김항대, 그의 최종학력은 학사다. 그러나 그는 1968년 오릉 초등학교(당시 월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실제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 캬라멜 공장 직공으로, 전자제품 수리점 종업원, 원양어선 선원으로 일하며 집안을 도와야 했다.
세월이 지나 사업에 성공하며 학문을 꿈꾸게 된다. 시의원을 지냈다. 또 색소폰에 인생을 묻으며 현재는 신경주대학에서 색소폰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아픈 아내를 위해 한없는 희생을 감내하고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을 어찌 글로써 다 형용할 수 있을까. (편집자 말)
■ 과거를 돌아보는 김항대의 절규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나이에 불우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는 절규하고 있다. 내 젊은 날 이루지 못했던 학문과, 내 젊은 날의 철학과, 내 젊은 날의 사랑과, 내 젊은 날의 행복과, 내 젊은 날의 시련과, 내 젊은 날의 몸부림을 가난을 극복하면서 음악 하나에 녹였다고 한다.
소년 김항대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쌀밥 한 그릇 드시도록 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잘살아 보기 위해 남들보다 노력하고, 뒤지지 않겠다는 몸부림이 가난했던 역경으로 인해 철저히 외면된 나의 철학과 이루지 못한 학문들...무엇이라도 좋다. 나의 영혼을 푹 빠지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정말 무엇이라도 좋다며 처절한 삶을 살아왔다”고 절규했다.
그는 내 육신의 마지막 불타는 정열에 기름을 붓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고독해지지 않기 위해 인생의 마지막 자리에 서 있을지라도 나는 결코 두려움 없이 살아가리라 맹세 또 맹세했다고 한다. 부지런한 자에게는 녹슬지 않는 아름다운 기회는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주어질 것이라는 좌우명으로 견뎠다고 한다.
■ 소년 김항대, 그의 유년 시절
그의 유년 시절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1955년 오릉 식혜골 김 씨 고택 아래채에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어려운 형편은 아니어서 현재 오릉의 숭덕전 옆 초가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가 화투에 손을 대면서 초가집마저 노름 빛으로 넘어가고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지금의 오릉 신호등 네거리 부근 쪽방으로 이사를 했다. 일제 강점기 때 마부들이 말을 키우던 ‘사택’으로 기억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5살 정도였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 고락은 시작된 것이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와, 둘째 형, 누님, 여동생이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돈이 없어 아버지 장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이웃의 장동어르신이 아버지 시신을 가마니로 말아 지게에 지고 도당산으로 운구하자 어머니는 “나 혼자 두고 가면 남은 자식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울부짖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그의 동생은 유복자다.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훗날 그는 그의 동생 둘을 직접 결혼을 시켰다. 먹을게 없어 물과 시래기(무나 배춧잎)를 주식으로 했다. 요행히 옆집에서 보리쌀이라도 꿔오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보리밥은 먹고, 보리쌀은 불려서 다음 날을 준비하곤 했다. 꾼 보리쌀은 어머니가 품앗이로 갚았다.
■ 월남국민학교 시절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면서 경주로 왔다. 한글을 모르고 가끔 일본어로 대화를 했다. 1962년 그는 최일철이라는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다.
어머니는 남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생계를 꾸려야 했기 때문에 학교는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최일철이란 분이 그를 데리고 입학을 시킨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분으로 기억된다며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항상 미움의 대상이었다.
등교를 하면 기성회비를 가져오라며 쫒겨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공부는 잘해 우등상, 개근상, 글짓기, 임명장, 웅변대회 상, 응원단장까지 도맡아 왔다. 선생님이 집으로 기성회비를 받으러 왔다. 어머니는 선생님께 사정만 했다. 꼭 주겠다고. 기성회비를 못 낸 그는 교실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5학년 때는 방학 때도 학교 청소를 해야만 했다. 기성회비를 내지 못한 댓가였다.
그림을 잘 그려 항상 선생님과 학우들께 칭찬을 들었다. 그가 그린 그림을 교실 뒤쪽 벽에 전시돼 있었다.
선생님의 칭찬을 받으면 눈물이 났다. 서러웠다. 돈이 없는 것이. 그가 초등학교 시절 잊지 못하는 선생님이 있다.
‘김영섭’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못 낸 기성회비를 그 선생님이 항상 내 주셨다”고 감사함을 기억하고 있다. 또 한 명의 못 잊을 선생이 있다.
실명을 밝힐 순 없으나 그 이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독하게 그를 괴롭혔다. 몽둥이로 100대를 맞아야 좋은 중학교에 진학한다며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특히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 수개월 후 학교 소사(잡일을 하는 직원)가 졸업장을 가지고 왔다.
중학교 진학을 하고 싶었던 그는 서울 경기중학교에 원서를 내고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12시간을 달려 시험을 봤던 기억을 상기했다.
결국 서울뿐 아니라 경주에 있는 중학교도 진학을 하지 못했다.
죽기보다 싫었던 가난 때문이다.
■ 초등학교 졸업 후의 역경
그는 이웃의 캬라멜 공장에 취직을 했다. 말이 좋아 취직이지 밥만 먹여주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잊을 수 없어 문화중학교와 시립국악원 중고등 과정을 기웃거렸다. 다니던 캬라멜 공장도 문을 닫아 지역의 한 소리사에 취직을 했다. 큰형님이 라디오 기술을 배우라고 해서다.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분으로 월급은 커녕 밥도 먹여주지 않았다.
인정도 눈물도 없던 그 사장은 결국 직계 존속에 의해 죽었다.
천벌을 받은 것인가.
세월이 지나 입영통지서가 나왔다. 밥 먹기도 어려웠던 그는 입대가 오히려 반가웠다.
122연대 3경비대대 전역 후 원양어선을 탔다. 외항 선원은 지독한 직업이었다. 외국 구경을 한다는 기대감은 온데간데없었고, 생과 사를 오가는 직업이었다. 외항선원으로 집으로 월급이 송금됐으나 집에는 한 푼의 돈도 남아있지 않았다.
■ 지인의 권유로 가스 사업을 시작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김항대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성공을 가져온 것은 가스 사업을 시작하고부터다.
사람들은 ‘성공’을 고급 승용차와 크고 넓은 집, 명품을 두른 물질적인 것을 떠올린다. 성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공은 자신에 대한 믿음, 꿈을 이루리라는 확신, 포기하지 않는 끈기, 그리고 어떤 불편함도 감수하는 인내의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다시 그와 인터뷰를 해나간다.
1979년 경주광광주유소 최진호 사장의 권유로 ‘경주 중앙가스’를 인수했다. 인수 금액이 1천300만 원인데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다. 담보물이 없어 대출도 안 됐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형수님이 친정으로부터 돈을 빌려주어 인수를 했다.
정말 불철주야 열심히 살았다. 잠을 자지 않고 배달을했다. 때는 정부가 LPG 사업을 확장 권장하던 때였어 사업은 날개 돗힌 듯 승승장구했고, 마감 후엔 돈을 셀 수가 없어 야간 금고에 입금하면 이튿날 은행에서 입금된 금액을 가르쳐 준다.
1982년 3년 만에 빚을 다 청산하고, 숲머리에 1천500만 원을 주고 한옥을 한채 구입했다. 내 동생(남, 여)들은 꼭 내 집에서 결혼을 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집을 구입하고 어머니를 안방으로 모셨다.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따뜻한 쌀밥을 차려드렸다. 또 형님을 그 집에 살게 하고 그는 사무실에서 생활했다. 또 남동생을 ‘천일주방씽크’라는 주방 인테리어 점을 개업시켰다.
그리고 결혼을했다.
숲머리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임대 아파트인 황성주공 1차로 분가해 첫딸이 태어나고, 둘째인 아들도 태어났다. 그러다 청구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한 맺혔던 공부를 시작했다.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 정치의 꿈을 키우며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의 황남동(구 탑정동) 청년회장을 맡으며 정치의 꿈을 키웠다.
제도권에 들어가 봉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TV에서 영천 야간학교를 알게 돼 입학했다. 마흔이 넘어 공부를 한다고 하니 다들 따라가기 힘들다고 말렸지만 중고 과정을 2년 만에 마치고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2001년 5월 8일과 2002년 5월 6일이다.
경주 서라벌대(2년 과정)경찰복지학과에 진학해 만학도 반의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전문학사 학위를 수여했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을 들고 어머니께 전화했다.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펑펑 울기만 했다. 인간 승리의 기쁨이었으리라. 다시 방통대 행정학과에 편·입학 했다. 방통대는 입학보다 졸업이 어렵다.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임원을 맡아야 적극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2007년 8월 31일 졸업을 하고 학사 학위를 수여했다. 2012년 경주시의원 보궐선거에 도전했으나 낙선하고, 2014년 새누리당 기호 1번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불우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시의원, 색소폰으로 봉사의 길 들어서다
22년간 꾸준히 연마 해온 색소폰 연주 실력으로 각종 행사에서 봉사를 했다. 당시 ‘색소폰 시의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의원 때 많은 인맥을 형성했다.
‘경주색소폰동호회연합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돼 ‘전국 색소폰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2024년 12월 제2회 대회를 앞두고 있다. 또 지난 10월 ‘제1회 경상북도 보문나드리 페스티벌’대회도 유치했다.
경주, 포항, 안동, 구미 예술인들이 경주로 집결해 보문 수상공연장에서 8회에 걸쳐 연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워낙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김일윤 신경주대학교 총장님께서 학교 색소폰과를 설립해 교수로 재직하게 은혜를 베풀었다.
■ 역경을 딛고 일어섰으나 아내는 병이 들었다
2016년 어느 날 아내의 말투와 행동이 이상했다. 급히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알츠하이머’란 진단이 나왔다. 서울 다른 병원에서 5회 검사를 진행했고, 부산, 대구, 밀양 등 명의를 찾아 양방과 한방을 다 다녀 봤으나 똑같은 병명이었다.
고생한 아내를 돌이켜 보면 눈물만 날 뿐이다.
아내를 위해 침술을 배웠고, 안마를 배웠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겠나 하는 심정으로 지금은 주간보호센터 보내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를 씻기고 아침을 먹여 아내를 보낸다. 오후 5시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면 목욕을 시키고 저녁밥을 먹여 잠들 때까지 케어를 하고 있다.
김항대, 지금 그의 꿈은 주간보호센터를 하는 것이다. 아내를 위해 평생을 봉사하기 위해 복지사 2급 자격을 득했다.
그의 삶은 한편의 ‘인생 드라마’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과연 인간 김항대 같은 인생 스토리를 가진 사람도 드물 것이란 생각을 했다.
정말 존경스럽다.
과연 필자가 같은 처지에 처해진다면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뇌에 빠진다. 김항대 그는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 어떤 불편함도 감수한 인내의 결과 중 ‘하나’를 이룬 것이다.
황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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