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시래기(時來記) | ⓒ 황성신문 | |
| | | ↑↑ 대구 한비수필학교장
명예문학박사
수필가 이영백 | ⓒ 황성신문 | 태어난 동네 이름이 좀 특이하다. 그 많고 많은 동네이름 중에 “시래동”인가? 고향 동네 이름을 살핀다. “근세조선 시대에 최사민(崔思閔)이라는 분이 초시에 열세 번 치렀다. 그러나 모두 떨어져서 때를 기다린다.”고 “때 시(時), 올래(來)자”로 “시래(時來)”라 불렀다한다. 국어사전에서도 “시래운도(時來運到)”라는 어휘가 실려 있다. 즉 “때가 되어 운이 돌아 옴”이라 풀이하였다.
동네가 이루어지려면 지세가 좋아야 한다. 내 고향 시래동은 경주분지에 형성된 살기 좋은 농촌이다. 특히 동해로 흐르는 형산강 남천 상류의 지류인 시래천이 있다. 게다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와 석굴암을 안고 있는 동으로 둘러싼 토함산(745m)이 있다. 남으로 내가 어렸을 때 “바위 얼굴”로 삼았던 마석산에 8m 기암이 있다. 또한 기념물로 “차성(車城)이씨 경기공(慶己公)의 부인과 자부의 양세정려각(兩世旌閭閣)”이 불국공설시장 입구에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열부와 효부의 표본으로 상징되고 있다.
늘 식량이 걱정 없던 고향 경주분지인 소한들 논벌에서 쌀이 생산된다. 신라 수도가 될 번하였던 개남산(介南山)은 구릉이다. 산이 너무 낮아 서울이 못 되어 오늘날의 시내로 옮겨갔다. 개자는 개복숭아나 개망초, 개불알풀, 개머루 등과 같은 참이 아닌 의미이다. 요즘 인터넷 지도에서는 “뒷산”이라 표기하여 두었다.
아직도 오일장 “불국공설시장”이 4 ㆍ 9일마다 열리고, 큰 공장으로는 “경주법주회사”가 있다. 학교로는 필자가 11회로 졸업한 “불국사초등학교”는 시래동 거쳐 들어간다, 새로 공립으로 생긴 “불국중학교”가 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겁도 없이 유치한 “경주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가 있다.
“조양지(朝陽池)”는 자연으로 생긴 못이 아니다. 근세조선시대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 없애려고 인공적으로 그 자리에 못을 파고 물 채웠다. 그 덕택으로 토함산 산그늘이 내리비치고 찰랑거리는 물속에 조사(釣士)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물론 어렸을 때 목욕하고, 고기 잡고, 새우도 잡았다. 요즘 인터넷 지도에는 “대제지(大堤池)”라 고쳐 표현하고 있다. 근세조선시대에 조양역이 있었던 곳이다.
자연동 이름이 아름다이 남아 있다. 보칠보, 쪼진뱅이, 아래시래, 감나무골, 새보, 중뱅이, 위시래, 시장거리, 소전거리, 구매, 광두뱅이 등 그 이름이 정겹다. 그 곳에 하나같이 얽히고설킨 나의 사연들이 추억으로 소복소복 남아있다.
시래천 둑길을 걷는데 동해남부선 부산으로 가는 세 칸짜리 빨간 전동차가 시간 맞추려고 부지런히 지나간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전동차마저 없다. 폐역, 폐철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철로와 철교가 사라졌다. 시래기 없는 “시래기(時來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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